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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 이야기(1)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17.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 로고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디올 

디올? 또는 크리스챤 디올? 어떤 말이 더 익숙한가요?

우리나라에서 블랙핑크 지수 씨가 앰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는 디올은 광고에서도 많이 나오기에

아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줄여서 디올로 알고 있지만 정식명칭은 크리스챤 디올입니다.

바로 디올브랜드를 설립한 크리스챤 디올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랜드죠

 

오늘은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의 탄생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의 설립자 크리스챤 디올은 1905년에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것과 꽃을 좋아하였던 섬세한 아이는 드로잉을 배우고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디올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사장인 마르셀 부사크가 직물회사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지만,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던 크리스챤 디올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1946년 12월 6일에 프랑스 파리 몽테뉴거리 30번지에 크리스챤 디올 부티크를 열었습니다.

이후 1947년 2월 12일에 첫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열었습니다.

 

이때의 크리스챤 디올은 "나는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라며 자신 있게 내놓았습니다.

이때 디올의 옷 스타일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복같이 딱딱한 옷을 입어야 했던 여성들을 겨냥해 

오히려 풍성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컬렉션을 '뉴룩'이라 표현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때 옆나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를 위해 비공식 패션쇼가 열렸을 정도로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은 디자인뿐 아니라 사업 쪽 수완도 좋았는데요.

마르셀 부삭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는데요 이때 협상술로 다른 사업체에 비해 예외적으로 많은 자율권과 의사결정권을 따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47년에 선보인 미스디올 향수

 

크리스챤 디올 부흥의 시작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은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 목표에 맞게 퍼퓸 크리스챤 디올을 설립해 향수 '미스 디올'을 발표했습니다.

 

1949년에는 기성복 라인인 프레타 포르테를 만들고 뉴욕에 기성복 매장을 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가 패션 사업의 중심이라고 여겨졌는데 크리스챤 디올이 기성복까지 분야를 확장한 것은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당시 크리스챤 디올의 판매 수익의 절반이 미국 수출을 통해 나왔을 만큼 미국에서 크리스챤 디올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디올의 심플하고 실용적인 기성복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시장에서 주로 판매가 되었고 고급 맞춤복 위주로 운영되는 파리 부티크는 영업 담당자가 고객과 일대일 관계를 유지하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유지하였습니다.

 

크리스챤 디올 컬렉션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 '익숙한 스타일을 살짝 변형한 것'. '누구도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클래식한 옷'이 3가지로 나누어 유지함으로 보수적인 고객과 새로운 것을 찾는 모든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거대 패션 제국으로 성장

매년 1월과 7월에 몽테뉴 거리에 있는 크리스챤 디올 부티크에서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가 열립니다.

쇼가 열 릴 때면 크리스챤 디올 본사 곳곳에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을 하는데요.

장내 아나운서가 의상의 명칭과 번호를 부르면 모델들이 나와서 패션쇼를 진행했습니다.

 

패션쇼가 인기가 너무 많아 늦게 오면 입장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50년 크리스챤 디올은 전 세계에 약 17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회사가 되었습니다.

1951년에는 프랑스 전체 수출의 50%를 달성할 정도로 상승했고, 프랑스 대미 수출액의 75%를 차지했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은 특히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통해 다양한 스타일을 공개했는데요.

1950년에는 볼륨을 상체에 집중한 버티컬 라인, 1951년에 둥근 실루엣으로 여성의 허리를 고통스러운 코르셋으로부터 해방한 오벌라인, 1953년에는 튤립라인, 1954년에는 에이치라인, 1955년에는 A라인과 Y라인을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1953년에는 첫 립스틱인 루주디올을 선보이며 화장품 시장에도 진출했습니다.

 

 

 

1956년에 크리스챤 디올은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1957년에는 '타임'지 3월 표지에 크리스챤 디올의 얼굴이 실렸습니다.

이로써 크리스챤 디올은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최초의 디자이너였습니다.

 

이때 타임지와의 잡지에서 크리스챤 디올은 "기계문명 시대에 패션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혁신적인 패션이라 해도 초라하거나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중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물론 패션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도락이지만, 지금 같이 암울한 시대에는 사치를 조금 장려할 필요도 있다."라고 밝히며 크리스챤 디올의 브랜드 철학을 이야기했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의 사망과 이브생로랑 영입

1957년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던 크리스챤 디올은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쓰러졌습니다.

결국 크리스챤 디올이 준비하던 스핀들라인은 크리스챤 디올의 유작이 되었습니다.크리스챤 디올이 사망한 이후 디올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브 생 로랑이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브 생 로랑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이브 생 로랑

 

 

1958년 1월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챤 디올 하우스를 위해 첫 컬렉션을 선보였고 트라페즈 라인을 선보였습니다. 트라페즈라는 뜻은 곧 사다리꼴이라는 뜻으로 어깨에서 스커트 도련까지의 퍼짐이 사다리꼴로 된 실루엣입니다.이 컬렉션을 통하여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쇼가 끝난 후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라며 거리에서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60년대까지 이브 생 로랑은 수석 디자이너 역할로서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같은 해인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거리의 청년들에게 영감을 받은 '비트 룩'을 발표하자 크리스챤 디올의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을 해고하였습니다.

우아하기보다는 파격적이었던 옷에 대해 귀부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해고를 한 것입니다.

 

 

디올의 발전역사를 보며

오늘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의 설립과 발전역사 첫 번째 이야기를 보셨는데요.

보통 브랜드 제품을 사기만 하지 그 브랜드의 발전과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생소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서 딱딱하고 칙칙했던 옷만 입어야 하는 또한 전쟁의 암울한 시기 속에서 예쁘고 좀 더 아름다운 옷을 입고자 한 여성들의 심리를 파악했던 크리스챤 디올을 통하여 시작하였고

디올 브랜드는 다른 명품 브랜드보다 여성들의 심리를 더 파악하고 잘 아는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 이야기 2를 통해 디올 브랜드가  이브 생 로랑 디자이너를 해고한 이후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발전해 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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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크리스챤 디올), 인스티즈(이브 생 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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