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이야기

국내 재계 순위 1위로 올라선 삼성

0316☆Dreambirt 2023. 5. 8.

 

 

 

삼성 그룹 로고

 

 

한국의 대표 기업, 삼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계 순위"

재계 순위 1위하면 어떤 그룹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한민국 국민의 99% 이상이 "이 그룹" 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은 굳건하게 재계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 그룹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4월 25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2023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발표하였습니다.

공정위에서 발표하는 이 자료를 "재계 순위" 라고 합니다. 재계 순위는 기업의 매출이나 순이익이 아닌 자산 총액을 기준으로 합니다.

 

삼성의 공정자산총액은 2022년에는 483,919억 이였으며 2023년에는 486,401억으로 재계 순위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재계 순위 1위의 기업으로써 성장해온 삼성 그룹의 시작은 어땠을까요?

 

1938년 삼성 상회

1983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였던 1938년 3월의 어느 날, 협동정미소의 주인 이병철 선생이 대구광역시에 삼성 상회를 창업하였습니다.

현재의 삼성 그룹의 지주인 삼성 물산의 모태라고 할 수 있죠.

당시 29세 나이의 이병철 선생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농지 투기에 실패한 후 자본금 3만원으로 농산물 판매와 별표 국수 등을 판매하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수 공장의 매출은 증가하였지만 모두 공장 설비에 투자하고 가족들은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다고 합니다. 지금의 삼성과는 달리 당시에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삼성 상회가 국내 굴지의 기업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겁니다.

 

1위와 2위를 차지하던 소표 국수와 풍국 산업의 아성을 이기지 못하고 별표 국수는 폐업하게 됩니다.

그 후 1942년 조선 양조를 인수하여 사업을 확장시키기 시작한 이병철 선생은 1948년 종로에서 조홍제 선생 (현 효성그룹 창립자)과 삼성 물산 공사로 삼성 상회를 재출범합니다. "나라에 부족하고 필요한 물자만 찾아 공급한다." 라는 이병철 선생의 전략은 삼성 물산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지만 6.25전쟁과 함께 삼성 물산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1952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재창업하게 되는데 자본금 3억원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1년만에 60억의 매출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 후 1953년 회사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일 제당을 세워 제조업을 시작합니다. 국산 설탕을 개발하게 되죠.

 

점점 사업을 확장시키던 이병철 선생은 1954년에 세운 제일 모직이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개발을 시작으로 제일 모직이 성공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동방생명 사옥 ㅣ 출처 : 뉴시스

 

 

대기업 삼성의 급속도 성장

 

1957년에 한국 재계 사상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시작합니다. 신입사원 공개 채용도 비서실 설치도 최초로 시행한 것이 바로 삼성 그룹이죠. 이듬해에는 계열사 관리를 위해 한국 재벌 중 최초로 비서실을 설치해 기업집단으로의 첫 출발을 시작합니다. 초기 인원은 20명에 불과했지만 점차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게 되고 현재 삼성 전자의 직원 수만 12만1천404명입니다. 

 

1963년에는 동방생명 (현 삼성생명) 및 동화백화점 (현 신세계백화점)을 인수했으며 1965년에는 중앙 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신문 용지 자체 수급을 위해 새한 제지까지 인수하게 되면서 삼성은 무서운 속도로 점점 몸집을 부풀렸습니다. 

 

이병철 선생은 항상 미래를 대비하는 선구안으로 내일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국내에서의 작은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내에서 제일이 된다든지, 국내 경쟁에서 이긴다든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함으로써 선진 외국과 당당히 맞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 라고 다짐하며 사업 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사명감을 가지고 다방면의 신사업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병철 선생의 사업이 순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닌데요,

1967년 이병철 선생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는데요.

 

2023년의 재계 경영 핵심 키워드인 '재도약' '위기 극복'

 

위기를 경험으로 녹여 더 큰 도약을 보여줬던 이병철 선생의 이야기,

계속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사카린 밀수 사건 그리고 2세 경영 체제의 시작

점차 사업의 규모를 확대해가던 삼성은 1966년 위기를 맞이합니다.

 

1966년 5월 24일, 삼성 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현 롯데정밀화학)이 일본 미쓰이그룹과 공모하여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 자재로 꾸며서 들여와 판매하려고 했다가 들통난 밀수 사건인데요, 사카린 이외에도 현금화가 쉬운 일제 냉장고, 밥솥, 양변기 등을 밀수하였다고 합니다. 사건 당시에는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5일 경향 신문의 발표로 밀수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이에 부산 세관 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만 원을 부과했으며 한국 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1968년 경영 일선에서 복귀한 후 수원 공단 부지를 매입하여 이듬해 삼성 전자 및 삼성 - SANYO 전기를 세우며 전자 산업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1970년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삼성 NEC를 세웠는데요, 1973년 제일합섬, 임피어리얼, 1974년 삼성석유화학 등을 세우며 화학이나 관광분야 등에도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을 시작했죠. 현재 삼성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사업을 보면 이병철 회장의 사업가로서의 안목과 기질은 감히 따라잡을 자가 없어보일 정도입니다. 

 

 

64K D램 개발의 시작

 

반도체 신화의 서막

 

1979년에 이건희가 부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2세 경영 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는데요,

 

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후 1982년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를 창단하며 종합연수원을 세웠고, 1983년 한국 최초로 반도체 신화의 서막인 64K D램 개발에도 주도했습니다. 삼성이 64K D램을 개발한건 국내는 물론, 세계 반도체 업계를 뒤흔든 사건이였습니다.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 10년 이상 뒤쳐져있던 우리 나라 반도체 기술 수준을 6개월만에 3-4년으로 단축했습니다.

 

삼성은 1983년 3월,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며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전격 발표하였습니다. 삼성이 발표한 선언문에 따르면 천연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 나라의 한계를 뛰어넘고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사업이 필수적이며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의한 성장 정체 등을 적시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인 반도체 사업을 더 추진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또한, 반도체가 파급 효과가 큰 기술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룹 내부는 물론 국내외 경쟁자들의 시선도 삼성의 결정에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는데요,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미쓰비스 연구소는 삼성 반도체 사업 불가론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삼성 전자의 열악한 규모, 취약한 관련 산업, 한국의 작은 내수 시장, 빈약한 기술 등을 이유로 들며 비판했지만 삼성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 그들의 주장은 틀렸음을 증명했죠.

 

삼성의 64K D램 개발 소식은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등 D랩 사업 진출을 고민하던 국가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도 충격적인 소식이라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요, 반도체 산업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6개월 만에 주력 D램을 개발했다는 소식에 많은 국가들이 심각하게 반응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초고밀도집적회로 (VLSI)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특히 64K D램 개발을 기반으로 완전한 기술 독립을 이루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바탕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전자 산업의 출발점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으로서 성장해오던 삼성은 1987년 11월 이병철의 사망 이후 이건희가 가업을 이어받아 회장직에 오릅니다. 회장직을 이어받고 1990년대부터 친족 분리를 시작했는데요, 1991년에는 신세계 백화점과 전주 제지를 분리시켰고 1993년에는 제일 제당을 분리시켰습니다. 1993년에는 신경영을 선언하며 로고와 기업 이념 등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또한, 1995년에 삼성 자동차 를 세워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합니다. 하지만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을 거듭 단행해 2000년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의 르노 니산 얼라이선스에 매각한 사건이 있었죠.

 

 

 

 

재계 서열 1위에 올라선 삼성

2001년에는 왕자의 난으로 공중분해된 현대그룹을 제치고 재계 서열 1위로 올라섰고, 2022년 현재까지 1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002년 실적을 보면 삼성 전자가 국내 기업으로는 사상 최초 한 분기 매출 10조원 이상을 달성하였습니다. 연간 매출도 40조원을 돌파하였는데요, 한해 매출은 40조5천1백15억원, 순익은 7조5백18억원으로 집계되었죠.

 

창사 이래의 최대 경영 성과였으며 2001년 대비 매출 25%, 영업 이익 216% 증가하였습니다.

오랜 기간 재계 순위 1위를 지키며 많은 성과를 보여줬던 삼성 그룹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1위 그룹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삼성 그룹이 우리 나라 기업이라는 것이 더욱 더 자랑스러워집니다.

해외에 나가서 삼성 그룹 간판을 보면 뿌듯하고 감동스럽다고도 하죠.

그럼 다음 시간에는 삼성하면 요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바로 삼성 전자의 주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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