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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만든 보석 브랜드, 까르띠에 (Cartier)

0316☆Dreambirt 2023. 5. 8.



보석 세공 천재가 만든 브랜드

 총매출 기준 3대 명품 시계 브랜드이자, 총매출 TOP 4 보석 브랜드인 까르띠에,
리치몬트 그룹에 속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는 보석, 시계 등 귀금속을 주력 상품으로 생산하는 명품 브랜드입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가 한 천재 소년의 손에서 탄생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11살의 나이에 보석 세공을 시작한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의 삶과
까르띠에가 지금의 명성을 갖기까지의 여정, 그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까르띠에의 시작

 

 까르띠에의 설립자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1819년 화약통을 제조하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손기술이 남달랐다던 그는 11살 어린 나이부터 보석 세공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된 까르띠에는 1847년부터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기술의 소유자로 평가받던 아돌프 피카드의 보석 세공 견습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몽고르트로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견습일을 하던 중 1847년 아돌프 피카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견습생이였던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스승의 아틀리에를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메종 까르띠에'로 아틀리에의 이름을 바꾸게 되죠.
 
이것이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의 시작이였습니다.
 
프랑스의 1850년대는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하면서 안정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입니다.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들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호화로운 파티를 즐겼습니다.
그럼 여기서, 호화로운 파티에서 귀족들의 치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석 (Jewelry)' 이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덕에 까르띠에는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자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마틸드 공주가 메종 까르띠에를 방문했고 뛰어난 세공 기술의 까르띠에 제품에 흠뻑 매료되었습니다. 그녀의 입소문 덕분에 까르띠에 제품들은 프랑스 귀족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850년대 말에는 메종 까르띠에가 프랑스 왕실의 공식 주얼리 납품 업체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여세에 힘입어 메종 까르띠에는 파리 상류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대로 9번가로 아틀리에를 옮기며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알프레드와 세 아들

 



세계적인 브랜드로서의 도약을 준비하다

 
1874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아들 루이 프랑수아 알프레드에게 일을 가르치며 가족 경영을 이어나가게 합니다. 아들에 아들을 거쳐 브랜드를 글로벌하게 키워나가기 시작했죠. 1898년 알프레드는 첫째 아들인 루이와 동업을 시작했고 1900년대 초에 영국과 미국 진출을 성공했습니다.  1899년 까르띠에는 명품 거리 뤼 드라 빼 13번지에도 매장을 오픈합니다. 알프레드의 세 형제 중 가장 사업 수완이 좋았던 루이가 뤼 드라 빼 매장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후 알프레드는 자신의 세 아들들에게 회사를 맡기며 세계적인 브랜드로서의 도약을 준비합니다.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보석상

 
왕관을 만든다는 것은 최고의 보석사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요, 1902년의 까르띠에는 그 해 진행될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 대관식을 위한 27개의 티아라를 주문받았습니다. 티아라를 만들어내는 것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고 이에 대단히 만족한 에드워드 7세는 2년 뒤인 1904년 까르띠에를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보석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영국 왕실을 차례대로 매료시킨 까르띠에는 벨기에, 스웨덴 등 유럽 전역의 왕실에서 사랑받기 시작했습니다. 루이를 비롯한 세 형제들은 최고의 보석을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보석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러시아, 페르시아 지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발견한 아름다운 보석들은 곧 까르띠에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당시 제작된 주얼리들 중 몇 제품들은 오늘날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남아있기도 하는데요, 까르띠에의 대표 컬렉션들은 다음 시간에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

 
까르띠에는 보석상으로 시작된 브랜드지만 현재는 시계브랜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까르띠에는 놀랍게도 시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손목시계를 개발하게 되죠.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평화로운 벨에포크 시대였던 당시 거리에는 아름다운 복장의 신사, 숙녀가 넘쳐났습니다. 특히 신사들은 양복 조끼 주머니에 회중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는데요, 까르띠에는 이때 보석뿐만 아니라 이 보석 세공 기술을 적용한 벽시계, 탁상시계 등의 시계를 제작하는 작업을 종종 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 까르띠에의 친구인 브라질 출신의 비행사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이 제안을 하나 하게 됩니다. 비행 중 시간을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손목에 고정되는 시계를 만들어달라 하였고 까르띠에는 바로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탄생한 것이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 '산토스' 입니다.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은 비행할 때 마다 이 시계를 항상 착용했고 남성들은 이때부터 손목 시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손목 시계 열풍에 까르띠에는 1907년 스위스의 시계 장인 에드몽 예거와 무브먼트에 대한 독점 공급 계약을 맺게 됩니다. 1911년부터 손목시계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까르띠에, 하이엔드 시계의 문을 열다


1914년 루이 까르띠에는 코코 샤넬의 소개로 연인이 된 쟌느 투상과 판다 (표범)의 반점을 형상화한 손목 시계 '팬더'를 제작하게 됩니다. 보석으로 구현된 화려한 팬더 장식이 특징인데요, 쟌느 투상의 거칠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모습을 영감 받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3년부터 1970년까지 까르띠에 디자인을 총괄하는 최고책임자로 활약한 투상은 이후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팬더 컬렉션을 발전시켜 지금까지 까르띠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 세계 1차 대전 당시 활약한 프랑스의 르노 탱크에서 모티브를 얻어 1919년에는 탱크 라인을 선보였습니다.
 
보석에 이어 시계까지 성공리에 선보여온 까르띠에는 가족 경영으로 세대를 거쳐가며 브랜드를 운영해 오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며 경영권을 일반 투자자들에게 위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 경영인들 손에서 브랜드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까르띠에는 현재 리치몬드 그룹 산하에 있으며 향수, 가방, 필시구 등 제품 개발 영역을 확대하며 과거의 명성과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7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영광을 받아온 대체 불가한 브랜드, 까르띠에.
까르띠에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며 그 영광을 함께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까르띠에의 컬렉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담긴 까르띠에의 컬렉션들, 궁금하시다면 구독하셔서 많은 이야기 함께 알아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출처 : 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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